I. 시대 개관
구석기시대란 인류문화의 시원부터 시작해 1만 년 전 무렵에 이르기까지 수백 만년에 이르는 인류문화의 원초단계 시기를 가리킨다. 이 용어는 원래 톰센이 삼시대법에서 정의한 석기시대를 러복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눈 것에 서 유래하였다. 19세기 말에는 두 시기의 중간단계로서 중석기시대가 정의되었 으나,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중석기시대의 문화상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구석기시대란 도구로서 타제석기 (뗀석기)를 만들던 때를 뜻하였으며, 20세기 초 까지 빙하시대와 동일한 시기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신생대 제4기 에 대한 연구가 넓어지고 각지에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서 구석기시대에 대 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최근 동아프리카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의 고인류인 사헬란트로푸 스, 오로린, 아르디피테쿠스 등의 화석이 속속 발견되었는데, 모두 대체로 700~450만 년 전 마이오세 후기의 고인류로 알려져 있다. 이후 플라이오세에 들어서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했으며, 250만 년 전 무렵부터 호모 속의 고인류가 출현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가 두발 걷기와 같은 신체적인 구조 가 갖추어진 시기라고 할 때, 이후 호모 속의 다양한 종의 진화에서 가장 큰 특징 은 두뇌용량의 증가라 할 수 있다. 타제석기의 출현은 호모의 등장과 함께 이루 어지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구석기시대가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다.
호모 속은 180만 년 전 무렵 시작된 플라이스토세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진화했고 아프리카를 벗어나 아시아와 유럽 각지로 진출하였다. 최근 이루어진 유전 자 연구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현생인류는 구대륙 각지의 호모 에렉 투스나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와는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약 20~1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는 뛰어난 지능과 상 징 및 예술 행위 같은 질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갖고 전세계로 확산하며 다 른 고인류집단을 대체해 나갔다. 오세아니아와 아메리카 대륙에 인류가 도착한 것은 각각 6만 및 1만 5천 년 전 무렵이다.
II. 구석기시대의 역사 자연환경
지구의 환경은 신생대 제4기 말에 이르러 극심하게 변화하였는데, 흔히 빙하시대 라 불리는 혹심한 환경은 수만 년 혹은 수십만 년의 주기로 반복되었다. 이렇듯 구석기시대의 환경은 많은 면에서 지금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구석기시대 연구 에서는 유적의 형성과 관련된 자연환경과 퇴적조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신생대 제4기 말의 환경변화는 매우 복잡한 양상이다. 1950년대 이후 심해 에 퇴적된 규조류 껍질을 구성하는 탄산염에 포함된 산소동위원소 비율을 분석 하고, 1970년대 이후 남극과 그린란드 만년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좀더 정확한 기후변화의 양상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거의 대부분 약 13만~1만 년 전의 플라이스토세 후기 동안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플라이스토세 후기는 간빙기로 시작했지만, 8~7만 년 전부터는 대체로 혹심한 빙하기 환경조 건이 계속 되었다. 특히 2만 여 년 전에 빙하는 가장 크게 발달해 해수면은 현재 보다 120~135m 가량 낮았다. 이때를 최후빙하극성기(Last Glacial Maximum, 약칭 LGM)라 부르는데, 한반도 및 그 주변지역도 혹심한 기후조건 아래 놓여 있었다. LGM을 비롯한 빙하기 동안 서해는 거대한 분지로 노출되어 있었으며, 동해는 내륙호가 되기도 하였다.
구석기시대의 혹심하면서도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은 동물화석에도 그 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에서 발견된 털코끼리 (매머드) 화석은 플라 이스토세 말 한반도 북부가 주빙하 환경이었음을 가리켜주지만, 검은모루와 두 루봉 동굴에서는 비교적 따뜻한 기후조건 아래에서 살던 동물화석이 발견되어 구석기시대 동안 한반도의 환경이 심한 변화를 겪었음을 말해준다. 현재의 한반 도의 지형적 윤곽은 구석기시대가 끝날 무렵 빙하가 녹으며 해수면이 높아짐에 따라갖추어지게 되었다.
III. 연구현황 역사
동북아시아의 구석기시대 연구는 1929년 북경원인(北京原人) 화석 발견으로 시 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많은 호모 속의 화석과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현재로선 가장 오래 된 유적이 약 100만 년 전 정도로 생각되는데, 섬 서성 남전), 하북성 이하만 지구의 소장량小長梁)과 동곡타지점 등이 대표적이다. 또 중기구석기의 대표적인 정촌(丁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보는 주먹도끼가 출토되었고, 비슷한 유물들이 광서(西)성 백색(百 色) 유적에서도 알려졌다. 한편, 일본에서는 1946년 군마(馬)현 이와주쿠(岩 宿) 유적이 발견된 이래, 많은 유적이 보고되고 발굴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3만 년 전 이후의 것으로서, 그 이전의 유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두만강변 동관진(현 강안리)에서 구석기로 보 이는 유물이 수습되었다. 하지만 1962년 함경남도 웅기 굴포리 서포항 유적 하 부에서, 그리고 1964년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된 것이 구석기고고 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북한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구석기 유적과 화 석인류 조사가 중요시되었으며, 궁극적으로 한민족은 수십만 년 동안 한반도 내 에서 독자적인 문화적 · 형질적 진화를 거쳤다는 소위 민족단혈성론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로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남한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은 1970년대 말까지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러나 1978년 연천 전곡리 유적의 발견과 조사는 구석기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충주댐 수몰지구에서 후기 구석기를 대표하는 수양개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후 각지에서 조사가 활발해지며 현재까지 1,000개 정도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되며, 임진-한탄강 유역에서는 50여 개 유적이 밀집분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플라이스토세 전기(약 170~73만 년 전)로 소급되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플라이스토세 중기(약 73~13만 년 전)의 유적도 그리 뚜렷하 지 않다. 상원 검은모루동굴, 단양 금굴, 석장리 하부층, 전곡리 하부층 등이 플 라이스토세 전기 혹은 중기 초의 유적이라고 보고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학계 에서 논란이 있으며 유적의 연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임진-한탄강 하류의 파주 장산리 유적의 단구퇴적층은 용암대지 형성 이전으로 추정되며 발 굴 결과 20만 년 전 내외의 연대값이 얻어졌는데, 임진강 유역에서는 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 발견이 기대된다.
고인류 화석의 경우, 한반도에서 북경원인과 같은 호모 에렉투스 화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른 시기의 화석은 평양 대현동 동굴의 역포인과 승리산 동굴의 덕천인인데, 모두 플라이스토세 후기의 호모 사피엔스이다.
IV. 시기 구분
연구가 축적된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구석기시대는 25~20만 년과 4만 년 전 전후를 경계로 전기·중기 · 후기로 나누고 있다. 구석기시대 동안 석기 제 작기술이 발달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석기는 크고 거친 형태에서 작고 정교하 며 규격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한 변화 경향은 한국의 구석기 자료에서도 인정할 만하지만, 변화의 구 체적인 양상은 아직 불확실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서구의 용어를 그대로 채택해 구석기시대를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보고 있지만, 객관적인 시기구분의 기 준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또 많은 유적의 연대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그 같은 뚜렷한 분기를 설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재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은 석기 자료에서 뚜렷한 변화가 인지되기 때문 에 설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특정 시간대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사용되는 경향이다. 특히 전기와 중기의 구분이 애매하며 중기의 설정에 여러 문제가 있음 이 지적된 바 있다. 다만 돌날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설정에 대해 서는 일반적인 동의가 있다.
V. 연대측정과 유적형성과정의 해석
시기 구분을 위해서는 유적이나 유물군의 나이를 정확히 측정해야 하지만, 많은 유적의 연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사용할 수 있는 연대측정 방법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절대연대측정이 가능하더라도 많은 구석 기 퇴적층이 하천운동이나 사면운동 결과 만들어졌기 때문에 측정 결과의 해석 을 위해서는 유적형성과정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퇴적층에 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유적형성과정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설명이 미흡한 경우가 종종 있어, 퇴적층이나 그 속에 포함된 유기물에서 얻은 절대연대가 유물이나 유 물군의 제작과 사용, 폐기의 연대를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인지에 대한 보다 신 중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를 보게 된다.
1990년대 이래, 구석기 연구자들은 흔히 '토양쐐기'라는 부적절한 용어로 불 리는 토양구조가 퇴적층 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음에 유의, 이것 과 유물층의 층서적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구석기 자료의 편년을 시도하고 있다. 아직 이 토양구조 자체에 대한 연구는 초보적 단계지만, 춥고 건조한 기후조건에 서 만들어졌다는 가정하에 이것이 나타나는 플라이스토세 후기 퇴적층에서 유물 의 상대적 위치와 절대연대측정값을 감안해 편년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부 터 제시된 편년안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각 유적의 퇴적 환경과 퇴적 이후의 변형 과정에 대한 검토와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이 대부분 야외유적이기 때문에 연구에서는 유적이 입 지한 지역 전반의 지형학적, 퇴적학적, 층위학적 분석과 평가가 필수적이다. 이 러한 연구는 다학문적인 접근을 요구하는데, 전곡리 유적을 필두로 많은 유적이 알려진 임진-한탄강 유역에서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 유적의 퇴적 환경 을 요약하면, 평강 압산에서 분출해 내린 용암으로 임진-한탄강 하계망에 퇴적 분지가 형성됨으로써 구석기시대 수렵채집민들에게 양호한 생활환경이 만들어 졌으며, 이후 하천의 하방침식으로 단구지형이 형성되어 유물 퇴적층이 보존되 었다고 할 수 있다.
전곡리 유적에서는 일찍이 이른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되었기 때 문에 수십만 년 전의 유적으로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후 퇴적층의 연대에 대해서는 4~5만 년 전의 TL연대가 제시되는 등 논쟁이 시작되었다. 최근 전곡리에서는 퇴적층 상부에서 AT(약 25,000년 전)와 K-Tz(약 9만 년 전) 두 종의 광 역화산재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일부 연구자는 풍성퇴적물의 정률적 퇴 적 모델을 적용하여, 기반 현무암층 위에 있는 최하 유물층의 연대를 30만 년 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퇴적층이 바람에 의해서 정률적으로 쌓였다는 가 정과 K-Tz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한편 최근에는 퇴적층에 대한 OSL 연대측정에서 10만 년 전보다 어린 연대가 계속 얻어졌으며, 용암 분출 시 기도 과거 생각했던 것보다 늦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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