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왕 엘리자베스 (시기 :1533년~1603년)
2003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서거 4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한 해 동안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 통치하던 45년 동안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했다. 또한 희곡은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문 은 다양하고 풍성한 행사 활동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여왕을 기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화로 자리 잡았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영국과 유럽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메리와는 달랐던 어린시절
어머니가 억울하게 비명에 가고 홀로 남은 엘리자베스는 이복 자매였던 메리보다는 행운아였다. 헨리 8세는 엘리자베스를 홀대하지 않고 메리에게 주지 못 한사랑을 모두 엘리자베스에게 쏟아부었다. 엘리자베스가 일상생활을 불편함이 없이 보내도록세심하게 보살피고, 그녀의 교육에도 특히 신경을썼다. 엘리자베스는 당시 문예 부흥 시기의 유명한 인문주의 학자였던 로저 애스컴 Roger Ascham을 비롯한 훌륭한 가정교사들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고전, 역사, 수사학, 윤리, 철학을 배웠으며, 그리스 어와 라틴어 외에 프랑스 어와 이탈리아 어 등 총 6개 국어를 배웠다. 이 때 습득한 유창한 외국어 실력은 훗날 외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엘 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하지 않았다면 아마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뛰 어난 학술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메리의 역사
엘리자베스의 행복한 어린시절은 너무도 짧았다. 1547년에 헨리 8세가 죽 을 당시 엘리자베스는 열세 살 소녀였다. 1553년에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엘리자베스의 불행이 시작됐다. 메리 1세는 아버지의 사 랑을 빼앗아가고 자신의 어머니를 고통 속에 죽게 만든 원수의 딸 엘리자 베스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굴욕과 탄압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메리 1세 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거짓으로 가톨릭 계율에 순종하는 척 하며 자비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부를 뒤 엎으려는 신교파 반란의 음모가 끊이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항상 메리 1세 와 구교파의 의심을 받아야 했다.
무려 45년에 걸친 엘리 자베스 여왕의 치세 기간에 영국은 눈부신 경 제 성장과 학문의 발전 을 이룩했으며 국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 주로 칭송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주모자로 지목되어 런던 탑에 갇혔다. 그러나 온갖 심문으로도 엘리자베스의 반역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자 두 달이 지나서야 런던 탑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 만 그 후 1년 동안 엘리자베스는 옥스퍼드 북부의 작은 마을인 우드스톡에서 연금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 대한 원한과 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 1555년 3월에 메리 1세는 주위의 압력에 마지못해 엘리자베스를 궁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엘리자베스 존재 자체가 애초 메리가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주된 원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메리 1세의 통치 기간에 줄곧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의 결백과 언니에 대한 충성, 그리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맹세를 끊임없이 다짐해야 했다. 1557년 11월 17일에 메리 1세가 죽자 엘리자베스는 마침내 고통 속에서 해방되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의 탄생이었다.
내각 정비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힘 난한 길이 놓여 있었다. 에드워드 6세 와 메리 1세의 실정으로 외채가 쌓인 데다 인접 국가들과의 관계도 악화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 엇보다 심각한 것은 애당초 헨리 8세가 씨를 뿌려 놓은 종교 갈등 문제였다. 1559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의회에 서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켜 신교가 영국의 국교이고 여왕은 최고 수 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재확인했다. 대신 가톨릭 교도의 불만을 잠재우 기 위해 중용 노선을 취했다. 메리 여왕이 가톨릭을 복권하려고 제정한 법 률을 모두 폐기하면서도 가톨릭 신앙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톨 릭 교도는 비록 교회는 다니지 못했지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설 사이를 어기더라도 약간의 벌금만 부과할 뿐 단두대로 보내거나 화형에 처하지 않았다. 이러한 중용 정책 덕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으로 있는동안 신교파와 가톨릭파의 대립이 줄어들어 국민 화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정치가다운 배포와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신교 와 가톨릭 간의 종교 분쟁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끝없는 전란으로 국토가 피폐하고 경제가 크게 쇠퇴했다. 이것만 봐도 엘 리자베스 1세가 영국 역사의 발전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왕권과 의회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데서도 엘리자베스 1세는 국왕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의회를 존중했다. 의회와 의견 대립이 생길 때는 융통성 을 발휘하여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1601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국 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 신흥 사업에 대해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여 자신 에게 아첨하는 귀족이나 상인에게 독점권을 팔았다. 이 에 의회에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통에 반독 점 논쟁에 빠졌을 때다. 이때도 엘리자베스 1세는 의회를 봉쇄하기보다는 의회의 주장을 수긍하고 자 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충돌을 피했다.
엘리자베스 역사 중 결혼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래 서 그녀의 결혼 문제는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 되는 중대사였다. 물론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 는 사람을 선택하여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릴 자유가 있지만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신하와 국민에게 안정감을 주는 상대와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는 국가의 중대한 정치적 문 제이자 차기 왕위 계승권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영국 국민은 거리 집회를 열어 여왕의 결혼을 재촉했고, 의회에서는 여 왕에게 하루빨리 결혼하여 후계자를 낳아 주기를 요청했다. 아버지 헨리 8세의 복잡한 결혼 생활을 직접 보고 겪은 엘리자베스 1세 는 결혼 문제에 매우 신중했다. 그녀는 자신이 신교파든 가톨릭파든 어느 한쪽과 결혼해도 전국적인 혼란과 피 튀기는 세력 다툼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도 행복한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 때문에 국가의 혼란과 왕권 약화라는 크나큰 대가를 치를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문제는 국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덴마 크, 스웨덴, 스페인뿐만 아니라 적대 관계에 있던 프랑스까지도 사신을 보 내 적극적으로 구혼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앞 다 투어 정략결혼을 제안하는 수많은 구혼자를 앞에 두고 오랫동안 고민에 빠졌다. 오죽했으면 프랑스 대사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는 6일 만에 세계 를 창조했는데 여왕께서는 어찌 80일이 지나도 결혼을 결정하지 못하십니 까?"라고 불평을 털어놓았겠는가?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누구와도 결 혼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위험이 더 기 때 문이다. 어느 한 국가와 정략결혼을 맺을 경우 다른 국가와 사이가 멀어져 서 외교적 균형이 깨져 영국에 불이익을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 래서 엘리자베스는 '처녀 여왕'이라는 매력을 한껏 이용하기로 했다. 구혼 자들을 서로 경쟁시켜 교묘히 실속을 차리면서 수년 동안 결혼 협상을 계 속했던 것이다. 훗날 의회의 대표단이 여왕에게 결혼할 것을 간곡히 권유 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라고 대답했다. 엘리자베 스 1세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친 셈이었다.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의 조카이자 왕위서 못했다. 영국인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스코틀랜드에서도 가톨릭 신앙 열 2위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지만 품행이 단정하지 을 불쾌하게 여겼던 신교파 귀족들에 의해 1567년에 강제로 폐위되었다. 갈 곳이 없었던 메리 스튜어트는 유폐됐던 감금 장소를 간신히 탈출해 잉 글랜드로 망명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로의 망명은 뜻밖에도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가톨릭파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가톨릭교에서는 앤 불린을 정식 왕비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딸인 엘 리자베스 역시 사생아로 왕위 계승 자격이 없다고 간주했다. 그들에게 메 리 스튜어트는 신교파를 내쫓고 가톨릭을 복권해 줄 새로운 왕위 계승자 이자 희망이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메리 스튜어트는 자의든 타의든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키려는 음모의 한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가톨릭파와 은밀히 손을 잡고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내 고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번번이 탄로 났다. 그래서 잉글랜드 내에서는 그녀를 죽이라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는 차마 메리 스튜어트를 죽일 수가 없었다.
사실 메리 스튜어트가 스코틀 랜드에서 폐위당할 때 강력히 반대한 사람이 엘리자베스였다. 그토록 미워 하면서도 메리 스튜어트의 폐위만큼은 거부했던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처형을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이는 아마도 동병상련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 이다. 엘리자베스 자신도 한때 반란의 주모자로 의심받고 연금생활을 당 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같은 왕족을 죽이는 잔혹한 일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점차 메리 스튜어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3세가 포고령을 발표하여 비열한 이단자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엘리자베스 1세의 암살 기도가 더욱 기승 을 부리기 시작했다. 1587년 2월 7일에 가톨릭 교도들의 음모가 도를 넘어서면서 엘리자베스 1세 는 의회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 사형 집행장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메리 스튜어트는 단두대 에서 참수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황혼의 역사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아래 영 국은 강력한 부를 축적했다. 엘 리자베스 1세가 처음 왕위에 오 를 당시만 해도 영국은 빚이 눈 덩이처럼 쌓인 채무 국가였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 이르러서는재정 수입이 두 배가 넘으면서 모든 빚을 청산하고도 국고에 돈이 넘쳐났 다. 1588년에 영국 함대는 당시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 와 대규모 해전을 벌였다. 영국 함대는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세계 제일의 해군 강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소원하던 세계 강국 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여왕은 우울증과 질병에 시달리며 점차 쇠약해져 갔다.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에 하루하루를 두려움 과 불안에 시달리며 보냈다. 1603년 3월에 병으로 쓰러진 엘리자베스는 언어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병석에 누운 엘리자베스 여왕은 손짓으로의 회 의장에게 유언을 남겼다.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 왕이 었던 제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23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엘리자 베스 1세는 영국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영국 르네상스를 꽃피운 위대한 통치자로 후세 길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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