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해당하는 조선은 초기 중기 후기의 역사로 나뉜다.
조선의 초기의 역사
1387년 고려 무신으로 우군도통사를 맡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창설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우왕을 즉위하고 폐위시켜 정부와 군사적 지도권을 잡았다. 장왕, 공양왕 등을 배출하여 새로운 혁명운동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과천법을 시행하여 경제지도자의 역할까지 맡았다. 이후 정몽주가 파면되자 1393년 음력 6월에 이성계가 공양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고 태조가 되었다.
1394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고, 1395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나중에 두 차례의 왕실 반란이 일어났다. 두 차례의 왕실 반란이 성공하고 태종의 왕위에 오르면서 이전에는 정당성이 부족했던 왕권이 강화되었다. 또한 그는 국왕 중심의 리더십 체제를 탈피하기 위해 하층 구조와 정부를 개편하는 등 관료 체제를 개편했다. 구체적으로는 사병의 수를 열거하고, 민간인에게 착취당한 개인을 복원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인 태조왕이 강방석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분노하여 다른 아들들의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때 왕실의 왕실 구성원에 대한 금지와 왕실 직원에 대한 인종 차별 제도가 하나의 규칙으로 통합되었으며, 비종교 여성(재혼 여성)의 후손에 대한 금지가 있었으며 세부 사항은 다음과 같다. 그 중 성종 재위 기간에 설립되어 영조 때까지 왕실 직원의 관직 임용을 규제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많은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한하고 사회적 비하를 불러일으켰다.
조선 초기까지 고려의 후계자들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정부와의 협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중엽 이후에는 고려 유신세대가 단절되고 그들의 자녀와 손자들이 새 정부에 편입되었다.
조선의 대표 왕인 세종대왕의 정권은 확고한 안정을 바탕으로 학문, 군사, 과학,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정치도 안정되었다. 또한 국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북부지역에 4개 군조직과 6개 사단을 설치하고 국경선을 마련하였으며, 포병창설과 조선기술의 발전을 통해 일본군의 도발을 막았다. 또한 궁궐 내에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전을 설립해 학술활동을 활성화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화약을 생산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명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은 조선의 최악의 법 중 가장 해로운 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노비종모법이라는 것이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세조도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보호제도를 부활시켰으며, 동국동감과 욱조보감을 창설하였다. 성종은 건국 이후 민정을 다시 개편하였다. 그는 또한 왕이 즉위 이후 유지해온 법령 편찬 사업인 경국태전의 편찬을 마쳤으며, 종교의례서인 국초오례의를 편찬하였다. 또한 신사대부 세력의 후예인 영남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칭찬할 만한 세력인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의 법제도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사림파는 정치에 있어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정치 스펙트럼의 사림파는 중종의 반역을 통해 중앙권력에 진입했고, 사림파의 대다수는 이 지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명종대에는 사림씨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비소훈구씨는 여전히 취약한 위치에 있었다. 이 시점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개체로 분리되었으며 그 결과 분파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중기의 역사
사림은 고려말 신중간정치운동의 후손으로 세조대 김종직 등 정치계 인사들 이후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왔다. 김종직은 세조의 즉위를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대에는 사림씨들을 끌어들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는 등 영향력이 커졌다. 또한, 이들은 농촌지역에 지역구제와 소호를 전파하는 등 지역단체 설립에 시간을 쏟았다.
초기에 신귀귀족들은 강제로 관직에 종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관직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대에는 그들도 임명되었고, 결국 귀족들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분쟁은 당사자들 사이에 발생하며, 각 당사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정부의 통제권을 놓고 싸우게 된다. 이것을 세력 전쟁이라고 하며 이처럼 서원은 본래 지역의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이었으나 결국 넓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들이 지역 권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지속적인 당파 갈등의 기반이 되었다.
거북선
1593년 일본 천황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입성한 임진왜란이다.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조선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포병대에 맞서 크게 싸웠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보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에 대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명나라의 지원을 비롯한 이들 자발적으로 조직된 군사조직의 활동으로 조선은 7년간 생존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마침내 압도당했다.
광해군은 선조 이후 왕위에 올랐고, 두 차례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또한 신흥 청나라와 몰락한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주장하는 실천외교를 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주민들로부터 정치참여를 거부당한 서인과 남인이 함께 1623년 정권을 잡으려 하였고, 광해군은 1623년 인조(인조의 난)을 일으키기 위해 직위를 포기해야만 했다.
조선의 후기의 역사
조선후기 정치는 주로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16세기 중반 예송논쟁에서 서인들은 결국 남인에게 세력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1670년 경신환국이 집권하면서 균형이 깨지고 서인이 남인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서인에서는 노론과 소론이 두 부분으로 나뉘었고, 이 부분들은 이후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영조는 노만파와 소론파를 배치해 당파 갈등을 불안하게 만들고 탕평론을 이념으로 삼았다. 영조의 지배적인 정치철학으로 인해 왕권은 강화되고 붕당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이러한 영조의 노력으로 탕평왕조는 그의 증손자 정조에게 계승되었다. 정조는 평화로운 정치 생활을 바라는 왕의 뜻을 따르고 이를 증폭시켰다. 또한 규장각은 당의 성장을 방해하고 국왕의 권위와 정책을 지지하는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전환되었고, 이 조직은 초계문신 제도를 시행하여 신인과 하급 관료들 중에서 인재를 양성하였다.
1810년 8월 28일 정조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어린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안동 김씨 가문이 정치권에서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이후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외가의 정치권력이 대대로 이어지며, 그 과정은 65년이 넘었다. 세도정치는 각종 비리를 낳은 부패한 정치형태인데,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전·군·환옥 등 소위 3권의 부패이다.
권력정치로 인한 사회혼란이 심화되면서 여러 내란이 일어났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순조대 홍경래의 난과 철종대 진주내란이다. 그러나 세도 정권의 탐욕과 독재는 나날이 증가했고, 사망자와 질병도 빈번히 발생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19세기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 시기에 서양 천주교가 대중화되고, 이에 따라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되었으나 모두 박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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