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왕국은 모두 저마다의 건국신화를 갖고 있으며,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주변의 작은 국가들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처럼 이들 국가는 고대 한국사회의 변두리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주적이고 지속적으로 건립되어 오랫동안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했으며, 4세기 중반 이후까지 서로 접촉하지 않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삼국시대가 실제로 562년 가야가 멸망한 이후에 성립되고 발전했기 때문에 '사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고구려의 역사
기원전 5세기에는 고구려의 인기가 높아졌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장악하고 임진강 이남과 한강 이남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는 내물왕을 도와 왜적을 퇴치하였다. 그는 또한 후연의 북쪽을 공격하여 요동을 완전히 점령했으며 추가적으로 요서 영토의 일부로 진격 하였다. 광개토왕은 숙신과 동부부여를 장악하여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6세기 중반 고구려는 국가로서의 역량을 크게 저하시키는 대내외적 문제를 겪었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단독으로 점유하고, 고구려를 압박하기 위해 현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진출했다. 589년 중국에 상륙한 수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4차례나 점령했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에서 수의 침략을 막으려는 고구려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대첩과 같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중국을 통일한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강경한 정책을 빌미로 고구려 영토를 침략했다. 당나라에서는 안시성에서 양만춘과 격전을 벌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국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받았다.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연개소문 서거 이후 지배층은 분열되고, 정치 환경은 동요되었으며, 민심은 왜곡되었다. 668년 신라-당 연합군이 공세를 취해 혼란에 빠진 고구려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당나라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의 옛 땅에 그 기반을 두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신라에 이양했다. 또한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점령한 장수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분파로 창건되었다. 이 나라는 압록강의 지류인 흥강(비류수) 분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세력은 처음부터 한족과의 갈등을 통해 커졌다. 1세기 태조 때 고구려는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출범시켰다. 또한 태조는 동예와 옥저를 토벌하여 추가 영토를 차지하였다. 고국천왕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상속제도를 실시하고 이를 목적에 맞게 조정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5개 구역을 신설함으로써 왕족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미천왕은 선평해전에서 승리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장악하고 한반도에서 한사군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고조선의 옛 영토도 되찾았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대에 백제와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대에 태학을 창설하고 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였다. 법을 제정하고 나라를 회복시켜 국가를 회복시켰다.
백제의 역사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하남성 웨이리성에서 건국하였다. 『삼국지연의』에는 백제가 마하항의 일부였다고 나와 있다. 3세기경 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게다가 북진은 고구려와 중국 군 사이에 영토 분쟁을 촉발시켰다.4세기 금작고왕 때 황해도 일부 지역을 침략하고 전라도에 남아 있던 마하한 세력을 합병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인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침체되어 있던 백제는 무영왕 때부터 회복되기 시작했고, 성왕 때 부여를 계승하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정하고 도읍을 우농진으로 옮긴다. 충청남도에서 사현성(사효성:충청남도 부여군)까지 세력을 늘리고 백제는 수도 이전을 비롯한 활성화 노력은 더욱 가속화됐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수복했으나 신라의 배반으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결국 관산성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후 백제의 무왕과 의자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의 거듭된 실책으로 국력이 허비되었다. 결국 660년 신라-당연합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백제 문화의 전반적인 특징은 정교함과 섬세함이며, 이는 일본과 다른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신라의 역사
신라는 삼국 중 가장 우선 건국되었지만, 마지막으로 중앙 정부를 수립한 나라였다. 당초에는 박·석·김 세 가문이 계승에 참여했다. 저명한 집단의 지도자는 이사금(군주)으로 지정되었고, 더 큰 집단은 그들만의 자율적인 권력권을 유지했다.
신라는 기원전 56년경 지금의 경주 지역에서 탄생했다
4.1세기 내물 이사금 시대에 신라는 적극적인 정복 방법을 통해 진한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중앙집권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씨 가문의 왕위 계승권은 보장되었다. 지증왕대에는 정치체제가 더욱 발전하여 국호를 신라로 개칭하고, 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내부적으로는 우산국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자 법흥왕은 군부를 신설하고 법률을 시행하며 관복을 시행하는 등의 서열을 세웠다. 또한 그는 계급체계를 재정비하고 불교를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진흥왕대에는 내부 화합을 도모하고 적극적인 정벌운동을 전개하여 삼국의 갈등을 주도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불교신앙과 같은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기관으로 개편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주도하던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함경도 영토까지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격파하고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구체적으로 한강 유역을 통제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적 역할을 갖게 되었으며, 서해를 통한 중국과의 직접 무역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6세기경 신라-당동맹이 결성되어 650년 백제, 667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그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 원산만까지 당군을 몰아내는 운동을 주도하여 삼국 통일을 이루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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