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시대의 역사
고조선의 영토는 단군조선시대와 위만조선시대로 나누어진다. 근대 이전 고대사에 등장하는 조선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서사로 여겨진다. 중국 역사상 고조선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쓰여진 제나라의 '관자(管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문서는 제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물물 교환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경 공자는 동방의 코르테르스 국가인 귀로 유배할 계획을 세웠는데, 귀는 중국의 고조선을 가리키는 다른 호칭이었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청동기시대 국가이다. '삼국유사'에는 요왕 즉위 50년 만에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나라는 현재 대한민국인 조선이다. 이 방법으로 연대를 정하면 기원전 2333년(약 4,400년 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정보는 단군 전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하다고 할 수 는 없다.
한편,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린 장군의 호칭으로, 특별히 인물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단군은 많았으나 이름이나 통치 기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환단고기에 근거하여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으나, 환단고기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역사가들은 환단고기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있지 못하다.
철기 시대의 역사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에 시작되어 서기 300년경에 끝나며,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5~4세기경 중국의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주철 기술의 도입으로 철제 농업 도구는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으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유물은 농기구, 무기, 주괴 등으로 모두 쇠막대 모양이었다. 이 주괴가 무덤에서 부장품으로 발견된 것은 당시 상류층이 철을 만드는 능력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철기 문화는 주철과 강철이 동시에 탄생한 데 기인한다.
고조선의 발전은 점진적이었고, 철기문화라는 방식으로 중국 한나라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만주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이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위만조선 등 여러 나라를 건국하는 기반을 갖게 되었다.
위만조선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왕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만들어진 나라이다. 위만조선 정권은 활발한 정벌사업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중앙정치구조를 갖추었으며, 한나라의 중개무역을 독점하여 막강한 지위를 구축하였다.
위만의 증손자인 우거왕은 많은 중국인 이민자들을 인정하고 '예나와 진궈'와 같은 작은 국가들이 한 왕조와 직접 대화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9년에 섭하에게 무가의 무역 독점을 중단하라고 요청했지만 무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한과 고조선의 갈등이 발생하고 기원전 108년에는 위만조선의 지위가 바뀌게 된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의 무제(吳帝)가 옛 조선 부근에 한사군을 창설하였다. 한사군은 제한된 기간 동안 활동했는데, 1347년부터 1358년까지 고구려 왕 미옹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합했다.
부여
부여에는 별도의 유래 전설이 있다. 해모수가 수레를 타고 내려와 북쪽의 흘승골에 마을을 세웠다는 설화와, 동쪽의 설화는 북부부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창건했다고 한다. 부여는 각 나라를 사출도라고 하는 4군으로 구성하도록 지정하고,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각 가문이 일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 가문을 인수하여 통치하게 되었으며 사출도의 넓은 지역에는 수천 가구의 인구가 살고 있는 반면, 작은 지역에는 수백 가구가 살고 있었다. 하층민은 모두가 노예층에 속하였다. 또한 부여에서는 영고(迎鼓)라는 의례를 거행했는데, 전통이 매우 엄격하여 절도나 간통도 매우 엄하게 처벌하였다. 북부 부여와 동부 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의해 정복되었다.538년 백제 성왕이 부여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로 바꾸고 국호를 유지했다. 백제의 국호는 부여(扶餘)가 되었고,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의 의령 여씨(宜寧 余氏)가 뒤따랐는데, 이는 충청남도 부여군 명칭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고구려의 신화적 기반은 부여 지배층을 이끄는 무장 주몽이 고구려로 이주하여 토착 군사였던 소노부를 대신하여 계층루부를 창설하여 고구려의 주도세력이 되었던 데 기인한다. 고구려 왕국. 고구려는 국토 면적이 좁고 산간 지역이 많아 주변 지역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 주변의 여러 작은 국가들을 정복하여 세력을 키우던 고구려는 부여를 점령하고 동양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동예와 옥저
동해안을 접한 지역에는 유지에(宇治)와 동예(塔惡)라는 작은 나라가 있는데, 이들은 리막족의 일파로 고구려와 유사한 언어와 풍습을 갖고 있다. 옥절은 현재 함경도에 위치한 나라로 리막족의 부족사회였다. 게다가 중앙에 왕이 없었고 각 지방은 공주가 다스렸다. 풍부한 자원과 비교적 큰 나라였지만 왕국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이웃 고구려에 속했다. 동효족은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는 부족사회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섬유기술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읍락은 산과 강으로 나뉘었고 각 읍락은 세 명의 통치자가 다스렸다. 유지에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삼한
기원전 8세기에는 한반도 곳곳에 비파 모양의 청동검을 사용하는 통치 체제가 확립됐다. 삼형동검이 기원전 4세기에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많은 도시국가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도 근처에 있는 고인돌 등 많은 고인돌이 남아있다. 정말 신기 하지 않은가? 기원전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에는 삼한시대에는 대국은 1만호, 소국은 600~700호로 70~80개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소국은 점차 연방왕국을 형성하여 한마하한(魔密族), 변한(結汉), 진한(智寧)의 삼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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